백조빌라_소설

3화_202호 수미

개복치 멘탈 클리닉 2024. 12. 12. 10:41

올해로 서른인 수미는 평소에도 화가 많았다. 

항상 뭔가 신경질적이고 진취적이었다. 

학생운동에 심취해 여대에서 총 여학생회 회장을 지내며 동지들을 위해 부르짖던 날도 있었다.

따르는 동생들도 많았고 나름 대학에서는 어깨 펴고 고개 좀 들고 다녔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쓰던 감투가 인생에 크나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오전 10시 믿기지 않겠지만 수미의 퇴근시간이다. 

어김없이 검은색 오토바이 복장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오토바이를 끌고 밤늦게까지 배달 일을 하고 들어오곤 했다. 

하루도 쉬는 날은 없었다. 녹초가 되어 들어와도 다음날 점심 피크타임 전에는 배달을 나가곤 했다.

여대에서 졸업 후 대기업에 출근했지만 5개월 차에 때려치우고 나왔다. 

 

나름 운동권 출신인 그녀를 노조에서는 내버려 두지 않았고 끊임없이 노조에 가입해서 뭔가 역할을 해주길 원했다. 

그녀는 입사 동기들과 풋풋한 신입 생활을 즐겨보기도 전에 투쟁이라고 쓰인 붉은 조끼를 입고 대학을 다닐 때와는 조금 다른 운동을 시작했다.

거창한 꿈을 안고 시작한 사회생활도 아니었고 노동환경을 바꾸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한 취업도 아니었다. 

단지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해서 취업을 했는데 수미는 또다시 피곤한 삶 속으로 본인을 몰아넣었다.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투쟁의 가사를 토해 내는 그녀 옆으로 짝사랑하던 동기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 친구와 지나쳐 갔다. 그 남자의 당황스러운 눈빛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수미는 단숨에 읽어내었다. 

수미는 그날로 조끼를 벗어던지고 긴 동굴로 숨어버렸다. 

 

동기가 그렇게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면 이럴게 아니었다. 

투쟁의 조끼와 머리띠가 부끄러웠다. 

정확하게는 입사동기의 여자 친구가 입은 하늘하늘한 예쁜 원피스가 부러웠다.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꺼내볼걸."

 

얼굴이 벌개져 바닥을 쾅쾅 발바닥으로 두들겨봤지만 달라지는건 없었다. 

 

동료 기사들은 그녀에게 친절했지만 그녀는 그들의 친절이 싫었다. 

질이 안 좋은 대행 사무실의 기사들은 그녀를 ‘대딸배‘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배달기사를 안 좋게 부르는 건 알고 있지만 그들끼리도 누군가를 배척하고 다르게 불렀다.

하지만 그런 걸 사사로이 따지며 논쟁하는 건 너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수미는 이제 이념이나 신념 이런 것에서 멀어져 살기로 했다.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타기 위해 안전장구를 겹겹이 구비했다.

검은 슈트로도 감출 수 없는 큰 가슴이 도드라졌다. 

누가 지은 별명인지 몰라도 찾아내어 살해하고 싶었다.

 

강해져야 했고 이런 상황에 어서 익숙해지는 게 나았다.

다른 일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어지간히 적성에 안 맞는 건 둘째치고 처음부터 몸으로 부딪혀서 기술 없이 큰돈을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보험이나 공사판도 다 기본 지식이나 각자의 주특기가 있어야 했다.

지금 당장 큰돈을 벌면서 몸으로 때우기에는 오토바이 배달밖에는 답이 없었다. 

골목골목 지리를 잘 알고 오토바이 잘 타고 신호도 잘 무시하고 수미는 모든 게 적합한 인재였다.

 

어떤이들은 대놓고 "우와~" 소리를 지르거나 했다.

신호 대기 중에도 양옆과 앞뒤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는 얼마 시간이 안 남은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젊을 때는 건강하고 괄괄하던 아버지는 평생을 술 한 잔 안 드시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지만 어느 날 갑자기 대장암 말기를 판정받으셨다. 

 

의사는 6개월을 이야기했지만 가족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빠가 이렇게 빨리 가는 걸 수미는 용납할 수 없었다.

병원비와 간병인 비용으로 한 달에 800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코로나로 인해 배달 대행 기사의 수입이 뉴스에 크게 난적이 있었다. 

동네 골목 구석구석 지리도 빠삭했던 수미는 배달일이 자신과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배달 일을 하며 가게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집 바로 앞의 카페 말고는 주인들의 그 눈빛과 질문들이 싫었다.

 

"여자가 배달 일을 하네?" 

"안 위험해요?" 

"왜 이런 험한 일을 해요?"

 

틈만 나면 호구조사를 당해서 매번 취조를 받는 기분이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하루에 50개 가까이 가게를 드나드는데 그중에 스무개 가게에서 

두서없이 던지는 질문에 짜증이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가게 주인들은 답답한 가게 안에 하루 종일 갇혀서 음식만 만드는 터라

누구라도 오면 말 한마디 붙여보는 게 낙인 주인들도 있었다. 

오랜 단골인 집 앞의 카페가 배달을 띄울 때는 잽싸게 잡았다.

카페에 잠시 앉아서 쉬는 시간만큼은 카페 사장과 이야기도 하며 잠시 쉬었다.

유일한 낙이었다. 

 

'백조빌라_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6화_101호 경숙  (4) 2024.12.16
5화_302호 인지  (5) 2024.12.15
4화_102호 홍할머니  (1) 2024.12.13
1화_오르막길  (3) 2024.12.11
프롤로그  (2) 2024.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