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은 9급 공무원이다.
철제 상가안의 작은 회사에 경리로 오랜 시간 근무했다.
소싯적 동호회에서 만난 친한 동생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공장이었다.
염색 기계를 만들어 팔거나 스테인리스등을 취급했다.
딸의 친한 지인을 직원으로 들인터이니 편의를 많이 봐주고 근무시간도 널널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시는 전무님 차를 타드리고 한 두시간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시간이 되면 알아서 인근식당 아주머니가 백반을 이고 오셨다.
10년째 같은 식당 사장님이 하신 밥이었지만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먹고 살았다.
전무님은 점심을 드시고 웹툰을 조금 챙겨 보시다가 3시쯤에는 일찌감치 퇴근하셨다.
경숙은 알아서 물건 챙겨서 내보내고 전표 한두장 정리하면 끝인 일이었다.
꽃 같은 20대를 공장에서 웹툰이나 소설등을 보며 뜨개질을 하며 소일거리로 10년을 지내왔다.
급여도 고만 고만하게 딱 먹고 살 정도만 벌어도 일이 편하니 만족스러웠다.
남들은 꿈의 직장이라며 추켜 세웠지만 뭔가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경숙의 꿈은 가정주부였다. 욕망이 없이 무망하게 사는 것이 경숙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아이키우다 늙어서 누군가와 곱게 죽는게 꿈인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꿈도 야망도 없는 자신의 신세가 뭔가 이상해 보였다.
친구들의 성화도 한 몫하긴 했다.
시집을 잘가거나, 사업에 성공하거나 한 친구들은 그런 경숙을 보며 참 속편하게 산다며 미주알 고주알 떠들어 대었지만
대부분 공감하기 어려운말들 뿐이었다.
처량하진 않았는데 뭔가 실패한것같은 이상한 패바감이 들었다. 진적이 없는데 패배감이 들었다. 분명 친구들 보다 행복하고 불만이 없는데 친구들은 그런 경숙을 들들 볶아내며 비교의 수렁으로 빠뜨리려 했다. 좋은 가방, 쓰지도 않는 금붙이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을 가진 사람이 관심이 없는 것과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경숙이 관심이 없다는 것에는 그 본질이 다르다고 이야기 했다.
어차피 그게 내 손에 없는건 마찬가지인데 왜 자기들이 성화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를 재워 두고 빨래를 개던 경숙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왜 야망도 없이 이러고 흘러가는대로 사는건가? 이러다 죽으면 나에게는 뭐가 남지?
이 생활에 만족하고 살아도 되나?
만약 하느님이 목소리를 내어
“응 그렇게 살아도 문제없어.”
“그냥 그대로 살아.”
라고 했다면 아마도 그대로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경숙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새로운 꿈을 위해 과감하게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고 합격했다.
경숙이 작정하고 공부에 매달린 동안 남편은 아이의 육아를 책임지며 경숙의 자리를 빈틈없이 채워주었다.
전무님의 배려로 회사를 다니는 중에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 할 수 있었다.
물론 공부를 안 한다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건 아니었다.
뜨개질이나 웹툰을 볼 시간에 공부를 했다는 것밖에는 달라진게 없었다.
12년을 다닌 회사를 퇴직하는 날 수고하셨다며 삼겹살을 사주셨다.
12년만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식이었다.
아이를 아침에 씻기고 밥 먹이고 유치원에 차 태워 보내는 등의 일을 남편은 마치 원래 하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적극적으로 해내었다.
아내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인양 남편은 그런 경숙을 물심양면으로 응원하고 지원해 주었다.
경숙은 새벽부터 도서관으로 향했고 경숙의 자리는 당연하게 남편이 매꾸게 되었다.
딸아이와 친한 친구인 3층 미정의 아들도 박씨가 함께 챙겨서 차에 태우고 받아주고는 했다.
3층 미정은 남편의 빈자리에 몹시 힘겨워했다.
1층 경숙과 남편 박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갓난 아기를 들쳐업고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아이를 찾아야 하는 일과 같은 곤혹스럽고 짜증이 베어나올 수 밖에 없는 일들을 박씨는 알아서 척척 도와주었다.
한달 내내 비가오는 장마철에는 아예 그 시간이 되면 1층에 살다시피 해야했다.
그럴때마다 1층 박씨는 “제가 애기 데려다 드릴께요 들어가 계세요.”라며 미정을 도와 주었다.
아이를 받아주고 가끔은 1층에서 같이 놀거나 평상에서 장난감 놀이를 했다.
경숙의 자리였던 자리에 박씨가 앉아 미정과 평상에서 차를 한잔하곤 했다.
백할머니와 홍할머니도 수더분한 성격의 박씨와 곧잘 어울렸다.
박씨의 무던한 성격과 재미있는 언변은 세 여자들이 푹 빠질만한 다양한 세상사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사진기자 일을 하는 박씨는 참 아는것도 많았다.
옥상에서 자신의 딸과 미정의 아들에게 종이비행기를 접어주며 같이 날리기도 했고
유치원의 누군가가 아들을 괴롭힌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분개해 하기도 했다.
1층 박씨는 누구보다 아들을 가지고 싶었지만 딸 하나로 만족하는 경숙을 더 이상 설득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3층 미정의 아들을 몹시도 이뻐했다.
집안에 큰 짐을 옮기거나 못이라도 박을라치면 1층 박씨의 도움이 절실했다.
도움을 받을때마다 박씨에 대한 고마움은 커져갔지만 딱히 감사를 표현할 길도 없었다.
카톡으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족이 다같이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케잌이나 작은 음료등을 보내는게 고작이었다.
“뭘 우리끼리 이런걸 주고 받나요”
라는 핀잔같은 말투의 박씨도 3층 미정과 가끔 주고 받는 카톡의 화기애애함이 싫지 않았다.
나쁜 상상이 떠올랐지만 정씨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었다.
지방에 내려간 형님은 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것이었다.
두 살 터울의 정씨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박씨는 혹여라도 그런 불상사가 생겨 가정이 파괴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그건 절대 안될 일이었다.
프리랜서 사진 기자로 활동하던 박씨는 시간이 널널한 편에 속했고 경숙이 하던 일의 대부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경숙은 그런 남편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래서 더 빨리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경숙이 옆 동네로 발령을 받고 근무를 하기 시작하고 안정을 찾았다.
남편은 미뤄두었던 자신의 일을 의욕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작은 신문사 촬영 기자로 근무하는 남편은 출장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거의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일요일 저녁에 들어오고는 다음날 또 나가고 했다.
쥐꼬리 만한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지만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데 어쩌겠는가.
어느 달은 50만 원 어느 달은 60만 원을 가져다주었다.
공무원 월급은 빠듯하고 아이의 학원비와 태권도비, 부식비등은 날로 부담이 되어 갔다.
아이가 어릴 때는 놀러도 자주 가주고 하더니 이제는 일에 미쳐 사는 남편이
어쩔 때는 짠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 많이 도와줬고 많이 희생했어. 이제 바깥에서 열심히 일하겠다는데 믿어줘야지 어쩌겠어.
언젠가는 자리 잡겠지.
딸아이가 아빠의 카메라를 제법 다룰 줄 안다.
켜고 끄고 사진을 찍거나 파일을 열어보는 정도는 어릴 때부터 가능했다.
아빠의 조기 교육이 힘을 발휘했다.
자기 몸통만 한 카메라를 들고 낑낑대며 사진을 찍는 딸아이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느라 바빴다.
딸아이가 카메라를 들고 쪼르르 왔다.
"엄마 카메라 안에 3층 이모 있어.“
"뭐? 응 아빠가 찍었나보네."
대단할 일은 아니었다.
3층 가족과 가든 가족끼리 여행을 가든 남편은 항상 바리바리 사진기와 렌즈를 챙겼다.
경숙과 미정의 독사진은 물론이고 가족사진도 연출을 참 멋지게 해서 찍어주었다.
프로가 찍어준다며 매번 너스레를 떠는 박씨를 다들 그려러니 했다.
카메라의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여긴 어디지? 뒤쪽 텃밭인가?
녹음이 짙은 덩굴담장과 파란 하늘과 노란꽃들 사이의 미정은 모르는 여자처럼 보였다.
이 언니 화장하고 꾸미니깐 몰라보겠네...
한두 장인줄 알았던 사진은 꽤나 여러장이었다.
업무의 흔적인 것 같은 공장사진도 카페 사진도 여러장 나왔다.
수백장의 사진이 나왔다.
아이를 차에 태우며 허리를 숙인 미정의 뒷모습은 유심히 보면 큰 엉덩이와 속옷의 라인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미정의 치아와 환하게 웃는 눈웃음은 어쩐지 모를 부끄러움이 숨겨져 있었다.
평상에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며 앉아 햇볕을 쬐는 미정의 모습
렌즈를 보며 웃는 미정의 행복해 보이는 웃음은 경숙에게 불안한 시그널을 주기 충분했다.
경숙은 너무나 구체적이며 실체가 확실한 불안에 휩쓸렸다.
비싼 디지털카메라를 바닥에 쾅 소리가 나게 놓아버렸다.
고장이 날만큼 쎄게 놓진 않았지만 그 소리에 놀란 딸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쇼?"
장난스럽게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냉랭함을 숨기지 못하고 경숙은 말했다.
"어디야?"
"어... 이제 들어갈라고"
"어디?"
"집에"
"응 빨리 와..."
"응 근데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냐 빨리 와..."
남편이 들어왔다.
방바닥의 카메라를 발로 밀어 남편에게 보냈다.
"뭐야 왜 그래?"
남편이 의아하다는 듯 카메라를 들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과 손가락을 경숙은 놓치지 않았고 확신하고 말았다.
“당신 미정언니랑 주고받은 톡, 내가 이상하다고 했잖아.”
“솔직히 말해 미정언니랑 무슨 ... 아냐... 어디까지 갔어 말해.”
“그런거 아냐 ...”
“뭐가 아닌데... 여기 이 사진들 뭐야.”
“둘이 무슨 사이 길래 이런 사진들이 여기 이렇게 많이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은건데?”
“엉? 설명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진과 카톡이 다가 아니었다.
분명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거라는 생각에 경숙은 심장이 조여오듯 답답해졌다.
경숙은 몸안의 모든 힘을 모아 크게 소리쳤다.
"나가!!!!! 이 새끼야!!!"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소리 질렀다.
살면서 아내의 욕을 처음 듣는 박씨도 움찔했다.
백조빌라가 살짝 흔들린다고 느껴질 정도의 공명이 울렸다.
그 기세에 놀라서일까.
아니면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을까.
캐리어에 다른 소지품을 대충 챙기고는 박씨는 집을 나섰다.
더 이상 말로 할게 없었다.
이렇게까지 단단하게 오해를 해버렸는데 무슨 수로 풀겠는가.
그리고 사실 일말의 죄책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기도 했다.
박씨 또한 자신의 어수선한 감정을 정리할 약간의 시간과 공백은 필요했다.
수현은 1층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내 1층 아저씨가 캐리어를 끌고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쓸쓸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가끔씩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딸아이에게 손을 흔드는 걸까?
아저씨는 다시 뒤돌아서서 또 손을 흔들었다.
카페 앞에서 배달을 가려던 202호 수미는 백조빌라 사람들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301호 아줌마가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201호 아가씨는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101호 꼬마는 입구까지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수미는 대체 이게 무슨 광경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수미도 손을 흔들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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