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호에는 이 동네 터줏대감 홍 할머니가 계셨다.
주차 라인에 놓인 평상의 실질적 소유자이다.
빌라를 깔끔하게 청소하고 힘들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셨다.
각 호에서 걷는 매월 15,000원의 관리비를 알뜰살뜰하게 쓰셨다.
건물을 보수하거나 하수구를 정비하거나 하는 일도 오랜 시간 동네에 계시며 쌓은 인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셨다.
백조빌라의 외부는 참 얼기설기 하수관들이 혈관처럼 지나가며 그 복잡한 속내를 대변하듯 지저분했다.
굵은 하수관이 세대마다 내려와 있고 타일도 떨어진 곳이 많았다.
오래된 건물에 살아본 사람들은 안다.
좁은 하수관으로 입주민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말이다.
한 세대라도 잘못해서 하수관이 막히면 그 라인의 전 세대로 하수가 역류하곤 한다.
집안의 모든 집기가 다 젖고 물을 빼낼 곳이 없으니 중앙 계단으로 물을 다 쓸어내고
한바탕 난리법석이 난다.
백조 빌라도 분명 그런 난리통을 한두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타일은 빈자리가 있었지만 더 이상 안 떨어지게 보수가 되어있었다.
하수도도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전기 줄들도 말끔했다.
계단도 깨끗했고 분리수거도 잘되었다.
오랫동안 빌라 관리에 공을 들여온 홍 할머니는 빌라에 무척이나 애정이 컸다.
주차라인의 평상에서 마주친 할머니는 누구라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잘해주셨다.
“쓰레기는 여기에 분리수거는 여기, 음식물은 저기“
깐깐한 할머니는 동네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는 정보통이었다.
누구네 집의 상황이 어떤지, 얼마에 팔리는지, 경매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의 아주 꼼꼼한 내용들까지도 훤하셨다.
할머니의 남편은 구청의 공무원을 하시다 퇴직 후에 황혼 바람이 나셨는지 아주 가끔 집에 들어왔다.
적적하다 하여 노래 교실도 다니고 회관에도 나가고 하더니 홍 할머니보다 더 늙은 여자와 합이 잘 맞았는지 시간만 되면 자유를 찾아 떠났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붙잡아도 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이미 늦게 배운 도둑질에 할아버지는 재미가 제대로 들리신듯했다.
할아버지는 가벼운 암에서 완치한 경험이 있었다.
짧은 병상에서 홍 할머니는 그럭저럭 병시중을 들긴 했지만 빠르게 퇴원한 할아버지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품으신듯하다.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이 하고 싶은걸 다 누리고 살리라는 생각을 하신 듯 작정하고 돌아다니셨다.
저러다 병들면 조강지처 못 잊어 찾아온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정정하셨다.
다른 할머니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눈길조차 안주며 욕을 해대기 바빴다.
할아버지는 날로 멋져지셨고 날로 시들어가는 할머니와 비교하며 내심 할머니를 측은하게 생각하곤 했다.
주변의 할머니들은 어서 당신도 새 삶을 찾으라 했지만 홍 할머니는 딱히 말씀이 없었다.
안 해본 게 무엇이겠는가.
쫒아도 내보고 옷가지도 버려보고 밥도 안 해줘 봤다.
하지만 그마저도 안 하면 비정기적이긴 하나 이 인간이 안 들어오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었다.
할머니는 번호키로 바꿀 법도 했지만 열쇠가 편하다며 고집하셨다.
문에 구멍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마지막 희망의 열쇠인 셈이다.
그 문이 덜컥 열리며 들어오는 할아버지의 가방에는 정리할 것이 별로 없다.
여행을 다녀왔다고는 하지만 항상 빨래는 깨끗했다.
그러니 할머니는 당연하게도 할아버지에게 다른 할머니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자기 손으로 빨래나 밥을 차리는 법이 없는 양반이..”
제주도를 다녀오면 감귤 초콜릿, 경주를 다녀오면 황남빵, 문경을 다녀오면 사과 두어 알이 항상 가방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문을 나서며 식탁 위나 냉장고 안에 항상 뭔가는 두고 나갔다.
서로가 말이 없다.
그냥 조용히 방문을 닫고 씻고는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으시곤 하셨다.
부스럭 거리는 신호는 또 집을 나선다는 뜻이었다.
밥을 차려줄 이유도 없거니와 죽던 말든 내 소관 아니라던 할머니도 어느새 그 생활이 익숙해졌다.
굳이 나가는 사람을 앉혀 "드슈" 하고는 안방을 무심하게 들어간다.
어느 정도 정성이 들어간 된장찌개에 밑반찬이 두어 개는 깔렸다.
불고기도 조금 볶아 내었으니 미운 맘에 비하면 할머니는 최선을 다한 셈이다.
할아버지 제사상도 이렇게 정성은 못 들일 터였다.
'달그락달그락'
할아버지는 말없이 그릇을 비우고 컵에 담긴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고맙다는 한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신발 신는 소리 짐가방을 울러 매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요. "
할머니는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서 더 이상 썩을 것도 없지만 이 망할 할아버지 구의
"가요"
한 마디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하늘로 가는 날도 분명 저러고 다시는 안 돌아올 것 같았다.
너무나도 뻔한 미래에 홍 할머니의 눈에는 짭짤한 눈물이 그렁하다.
늙으니 눈물도 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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