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빌라_소설

1화_오르막길

개복치 멘탈 클리닉 2024. 12. 11. 10:08

은색 캐리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자그마한 체구 덜컹 거리는 캐리어는 수현의 마음 만큼이나 피곤에 절어 있었다. 

여러 가지 귀여운 모양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여행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훈장처럼 이곳저곳이 찌그러졌다.

오랜 서울 생활에 수현의 마음도 이곳저곳 찌그러져 지쳐가는 중이었다. 

 

뜨거운 날씨에 부동산을 여러 곳 전전할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최소한 차가 들어오는 정도의 길이 가깝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게 수현의 바람이었다. 

미로 속의 던전처럼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을 방이라고 소개해주는 업자들의 마음도 모를 바는 아니지만 여자 혼자 산다는데도 끝끝내 그 따위 방을 추천하는 부동산 사장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수현이 지낼 집은 사실 수현이 고르는 것이 아니라 수현이 끌어낼 수 있는 돈의 총액이 정해주는 사안이긴 했다.

 

부동산 사장들도 수현이 아닌 수현이 가진 잔액의 총량에 따른 중계를 해주는 거니 따지고 들면 수현의 금전에 죄가 있는 셈이다.

잔고 800만 원, 잔고가 허락하는 날까지 우선은 서울에서 버텨야 했다.

 

서울에 이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은 고시원 말고는 없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비약이 심한 친구는 그냥 자기랑 같이 살고 생활비를 반씩 내자는 제안을 했지만 수현은 그런 제안이 반갑지 않았다. 

까다로운 본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반 백수 수현은 시간표가 없는 삶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일하고, 자고 싶으면 자고, 글을 쓰고 싶으면 썼다.

직장 생활을 하며 푼푼이 모으고 부모님께도 손을 벌려 5,000만 원을 모아서 상경했다. 

누구나 그렇듯 작가로 크게 성공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의 삶을 꿈꿨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며 이는 요원해 보였다.

한 번, 두 번, 이사를 가면 갈수록 수현의 보증금은 홀쭉하게 야위어 갔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이사가 될 것이다. 

이마저도 견뎌내지 못하면 분명 다른 동료 작가들이 그러듯 생업을 찾아 전업을 하거나 엄마 아빠가 있는 고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가슴을 활짝 펴고 금의환향해야 할 텐데, 수현은 쪼그라드는 살림살이만큼 자신감도 쪼그라들었다.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 있다지만 규칙 없는 시간표처럼 수현의 영감은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은 수현을 피해 가는듯했다.  

 

나 편한 대로 선택형 비건 이기도 한 수현은 누군가와 냉장고를 같이 쓰는 것 또한 마뜩잖은 상황이다. 

저지방 우유를 굳이 비싼 돈 주며 사는 수현을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는 지방을 뺏으니깐 가격을 낮춰서 판다는데, 우리나라 기업은 왜 유지방을 빼서 다른 유제품에 사용하면서 왜 더 비싸게 받냐고 은근히 수현의 소비패턴을 국내의 양심 리스한 대기업에 빗대어 비아냥 거렸다. 

치킨도 족발도 배달시키지 않는 수현에게 친구는 매번 늦은 저녁이면 볼멘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한 번만 먹자 응?"

"아냐 너 혼자 먹어. 난 괜찮아."

"이걸 어떻게 혼자 먹어? 응? 한 번만."

끝끝내 거절하기조차 귀찮은 수현은 한두 번 응해주었지만 영 입맛이 당기지 않아 한두 점 입을 대는 척하고는 다른 일을 찾곤 했다.

다른 건 참아도 식성이 다른 건 참을 수 없었다.

오랜 백수 신세라 매 끼니 까다롭게 관리해야 한다고 다짐한 터였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거나 저녁에 회식 같은 게 없이 오롯이 집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무절제한 소비와 건강을 해치는 생활 패턴은 분명 서울 생활의 마침표를 빠르게 찍어줄지 모를 일이었다.

편의점 삼각 김밥과 도시락, 샌드위치 등을 혐오하는 수현은 몇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난 인물이었다. 

"아주 무병장수 하시겠어요 한수현 님" 

"그러다 2100년까지 사는 거 아냐?"

근처 샐러드 가게에서 잡곡이 어느 정도 함유된 김밥 한 줄과 닭가슴살 샐러드를 샀다.

기름기 없는 담백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샷 추가해서 보온병에 테이크 아웃했다. 

샷 추가가 500원이지만 단골 카페에서는 샷 추가를 무료로 해주었다. 

반쯤 마신 커피가 아쉬워질 때면 마트 행사 때 구입한 블랙커피 2개를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넣고 뜨거운 물을 리필해서 다시 한잔을 가득 만들곤 했다. 

사실 돈이 궁해서도 있지만 설탕 없이 그저 쓴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보내는 게 익숙했다. 

수현은 사실 매일 커피가 모자라다.

중독은 사치를 부르기에 절제할 뿐이다. 더 좋고 더 많은 커피 그게 무슨 소용이랴.

어차피 하루에 마실 커피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수현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다짐만 수년째 하고 있다.

남들 두 끼 먹을 비용을 한 끼에 쓰더라도 남들 세끼 먹을 때 한 끼만 먹어도 되니깐

남들보다 돈은 덜 쓰게 된다는 기적의 논리였다. 

장도 편안하고 군살 없이 날씬한 몸매도 유지되었지만

이십 대 중후반이 된 요즘 부쩍 체력 달린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 한 끼라는 유행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드르륵 캐리어 바퀴 소리가 그런 수현의 체력을 더욱 끌어내렸다. 

연료가 필요했다. 뒤로 맨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었다. 

쓰디쓴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마시니 다시금 정신이 들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가자 가.”

 

언덕과 언덕 저 너머의 고지 가장 끝, 그 끝에 붉은색 빌라가 눈에 들어왔다. 

반지하까지 포함하면 총 8세대가 있는 3층 빌라였다. 

 

[백조빌라]

이름 한번 참 촌스럽다. 이런 빌라의 작명은 대체 누가 하는 건가. 

백조들만 모여 사는 빌라인가? 

빌라 가격이 백조?

유치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앞으로 마주칠 주민들의 행색은 대부분 늙은 백조 들일 게 뻔하다는 선입견을 슬며시 챙겼다.

“요즘 것들은 이런 곳에 안 살겠지.”

그나마 요즘 것들의 범주에 들고 싶은 수현은 못내 자신의 처지가 우울해질까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차가 겨우 올라오는 언덕에 위치한 빌라에는 어설프게 그어진 주차공간이 2면 있었다.

나름 깨끗하게 잘 관리된 오래된 소나타가 한대 서있었고 주차면의 한 면은 평상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S"가 빠진 오나타다. 누군가가 크고도 헛된 꿈을 가지고 S를 떼어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의 차에서 이니셜을 하나 떼어갔다고 꿈을 이룬 자가 있기는 했을까?

수현은 그럴 거면 자동차 이름을 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sonata로 지어서 국민 모두가 성공하는 사회가 되면 어떨까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해보았다.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게 잘 닦인 차량 위에 덩치가 큰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이 동네는 누런 고양이 투성이네.”

차량의 주인처럼 앉아있는 고양이는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는 했다.

빌라의 빨간 벽돌이 군데군데 떨어졌지만 보수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오래되긴 했어도 누군가 깔끔하게 관리한 흔적이 보였다.

주차장의 평상에는 볕이 좋은 날답게 빨간고 추나 각종 듣도 보도 못한 식물의 씨앗, 무청 같은 것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고스톱을 치거나 막걸리 한잔 하면 딱 좋을 사이즈였다.

수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평상 위의 구석자리에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수현이 처음 만난 늙은 백조 아니……. 102호 홍 할머니였다.

 

“어쩐 일이에요?”

수현의 정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홍 할머니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인자한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방좀 보러 왔어요. “

“혼자 살아요?”

“네.”

“그래요. 아가씨, 참 참하네.”

“올라가 봐요.”

“저 죄송한데 캐리어 좀 여기 두고 가면 안 될까요?”

“응 둬요.”

“감사합니다.”

 

홍 할머니는 이름 모를 차를 홀짝이며 평상에 앉아 언덕 아래의 골목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오를 때는 암벽을 타는 듯 경사져 보였지만 막상 뒤를 돌아보니 완만했다. 

그 언덕을 오르는 수현을 홍 할머니는 처음부터 보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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