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세번 오른것 같은데 201호였다. 빌라가 다 그렇지 뭐...
202호는 현관문 앞의 번호판이 없어져서 왼쪽의 201호만 유독 반짝거리는 듯 돋보였다.
부동산 아줌마는 그 빌라는 너무 높기도 하고 관절이 안 좋아서 같이 올라갈 수 없으니 가보고 마음에 들면 짐을 풀고 안 그러면 열쇠를 가지고 내려오라고 했다.
“참 편하게도 일하는구만...”
만약 집이 마음에 들더라도 이 부동산 아줌마의 복비를 어떻게든 야무지게 깎으리라는 결심이 들었다.
작은 거실과 주방, 안방과 작은 화장실 그 옆에 또 작은방 나름 깨끗했다.
도배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고 장판은 완전하게 새것이었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시 방을 안 구해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다시 캐리어를 끌고 그 긴 언덕을 거꾸로 내려갈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정도 보증금에 이런 방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수현은 감사했다.
역시 부동산은 발품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전면의 창은 아주 큰 통창이 아니라 겨울에는 난방비 걱정을 덜 수 있을듯했고 여름에도 통풍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빌라로 진입하는 입구가 정면이라 애쓰며 오른 언덕이 길게 보였다. 저 아래에서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좌측의 카페와 우측의 편의점 간판이 보였고 고칠 것이 끊임없이 나오는 동네의 터줏대감 철물점 간판도 저 멀리 보였다.
한집 건너 한집 있는 미용실도 여러 개 보였다.
이 정도면 뷰도 나쁘지 않은 듯하고 동네의 근황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는 수현이 좋아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해가 쨍하지 않다면 책상을 창 쪽에 두고 동네를 내려다보며 글을 쓰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수현은 그런 포지션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학창 시절부터 수현은 항상 구석 제일 뒷자리에만 고집했었다.
문 쪽 말고 창 쪽이었다.
각 반의 사물함이 있는 창 쪽 자리는 뒤쪽의 마포 걸레 냄새가 나거나 한 여름에는 주전자 물이 썩는 냄새가 나곤 했지만 운동장의 풍경도 보이고 반 아이들 모두의 뒤통수가 보이는 자리였다.
뒷문 쪽은 소위 힘깨나 쓰는 친구들이 점심을 빠르게 먹기 위해 포진한 자리이다.
소위 서열이 낮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잘 보이는 앞자리나 환경이 안 좋은 자리에 앉기 마련이었다.
관찰자 시점을 좋아하는 수현은 친구들의 뒤통수 사정에 훤했다.
얼굴은 가면을 씌울 수 있지만 뒷모습은 늘 정직하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동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덕 밑으로 걸어 내려가며 각자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분주하고 바쁜 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언덕진 동네의 뒷모습 옆으로 해가 쨍하게 떠올랐다.
어느날 수현의 집으로 어느 날 비글 한 마리가 집안으로 쏙 들어왔다.
커피를 사들고 집에 들어오는 그 타이밍에 잽싸게 들어온 것이다.
제 집인 마냥 들어온 아이는 꼬질 꼬질 한게 누가 봐도 버려졌거나 가출을 했을터였다.
모종의 사건 이후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기로 결심한 수현에게 그 강아지는 한 순간에 모든 나쁜 기억을 없애주었다.
팔랑거리는 큰 귀와 큰 눈망울 날렵한 허리와 뾰족한 허리가 예뻣다.
다시는 널 잃어버리거나 잡아먹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고기‘ 라 짓기로 했다.
수현은 채식주의자이다. 처음에는 돼지고기 소고기 이제는 닭까지 넘어왔다.
시간이 흐르고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씩 그 범위를 차근차근 늘려갔다.
딱히 공부를 하거나 체계적인 채식이 아니라 그저 먹기가 거북 해지는 음식들은 편식을 하게 된 것이고
그게 육고기 종류였을 뿐이었다.
몸이 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질 때면 새우나 갑각류도 조심히 먹어야 했고 익히지 않은 해산물 등은 더욱 조심하거나 하나씩 안 먹게 되었다.
자취생 입장에선 우유나 달걀 등은 생존을 위해서는 먹어줘야 했다.
그만큼 편리한 영양보충 식품도 없다는 생각을 늘상 하곤 한다.
수현은 계란 후라이를 유독 좋아했다.
하얗고 동그랗게 노른자가 따뜻할 정도로만 익혀서 반숙으로 프라이 해서 빵과 함께 먹곤했다.
수현은 가방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메달을 떼어 내었다.
전화번호가 적힌 메달이었다.
오래전 가족같이 키우던 차반이 생각에 눈가가 촉촉해진다.
6년간 수현의 곁을 지키다 떠난 강아지 이름은 차반이었다.
오래전 보통의 날이었다.
수현은 차반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동네의 유명한 주정뱅이 둘이 갑자기 달려와서 축구공 차듯 차반이를 발로 차고 도망갔다.
수현은 엌하는 소리도 못 내고 주저앉고 말았다.
차반이는 "깨깨갱"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축 늘어졌다.
3일 동안 울어도 차반이는 부활하지 못하고 그만 무지개다리를 건너 버렸다.
술만 먹었다 하면 동네의 간판과 기물을 부수거나 주차된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를 부수고 도망가는 놈들이었다.
그때마다 각자의 어머니가 경찰서를 찾아와 경찰관과 피해자들에게 석고대죄하며 머릴 조아렸다.
소위 깽값은 어머니들의 몫이었고 술값과 화대 역시 결국은 어머니들의 주머니에서 털려 나온 셈이다.
둘은 카드발급 영업을 하거나 채권 추심 등의 일을 하며 돈이 생기는 족족 인근의 환락가를 찾곤 했다.
망해나간 우유 대리점을 빌려서는 컴퓨터 6대를 놓고 무슨 게임을 24시간 돌렸다.
아덴인지 뭔지를 캐낸다고 했다.
합의금이 없다던 그놈들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놈들을 왜 감방에 안 넣고 합의금부터 이야기 하는지 어린 수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아지는 생명이 아니라 물건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남의 물건을 훼손한 죄로 30여만 원을 보상받을 수 있다 했다.
고소를 하자해도 딱히 얻을게 없었다.
천벌을 받을 새끼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